
문익공 영정(文翼公 影幀)
文翼公 鄭光弼
이 동래군(東萊君) 난종(蘭宗)의 아들 4형제 광보(光輔:부사(府使)), 광필(光弼:영의정(領議政)), 광좌(光佐:군수(郡守)), 광형(光衡:직장(直長)) 가운데 「문익공파(文翼公派)」로 불리는 중종조(中宗朝)의 명상(名相) 정광필(鄭光弼)의 후손(後孫)에서만 13명의 정승(政丞)과 대제학(大提學) 1명, 판서(判書) 10여명등 정2품 이상의 벼슬만 30여명이 나왔고, 그
가운데서도 광필(光弼)의 넷째아들 복겸(福謙:강화부사(江華府使))의 아들인 임당 정유길(林塘鄭惟吉:대제학(大提學) 좌의정(左議政))의 자손에서 큰 벼슬이 많이 나왔다.
수부 정광필(守夫鄭光弼) 문익공(文翼公:1462~1538)은 안당(安瑭), 김정(金淨),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등과 더불어 「8현(賢)」으로 일컬었으며 연산군(燕山君)의 사냥이 너무 심하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아산(牙山)으로 귀양가기 시작하여 「3흉(兇)」에 거슬려 관력의 절반을 유배지에서 보냈는데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재 기용(起用)되었을 때 육식(肉食)을
금하고 “전임금의 생사를 모르는 처지에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여 사람들을 탄복시켰다.
중종(中宗)11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몇년뒤 기묘사화(己卯士禍:1519)가 일어나자 당시 신진사림파(新進士林派)의 영수(領袖)이던 대사헌(大司憲) 정암 조광조(靜庵趙光祖)을 구하려다 파직되어 회덕현(懷德縣)에 내려가 있다가 김해(金海)로 귀양가는 길에 지은 시(詩)가 「당적보(黨籍譜)」에 전(傳)한다. 귀양에서 풀려나와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돌아간 뒤 중종묘정(中宗廟廷)에 배향(配享)되고 「문익공(文翼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서울 會洞 鄭氏
서울 중구 회현동(中區 會賢洞) 1가 14번지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의 옛 기지(基地)였다. 남산(南山)아래 회동(會洞:지금의 회현동)은 중종(中宗)때 영의정(領議政) 문익공(文翼公) 광필(光弼)이 살던 터로 약400여년간 자자손손(子子孫孫)이 대를 이어 지켜왔던 유서깊은 곳이다.
한성지략기록(漢城識略記錄)에 의하면 문익공(文翼公)의 꿈속(夢中)에 신선(神仙)이 나타나 12개의 서대(犀帶:정1품직의 띠는 물소뿔로 만든 허리띠)를 집앞 은행나무에 걸고서 “정씨가문에서 많이 정승에 오를 것이다”하였다고 전설(傳說)이 말하고 있다. 과연 이곳을 근거지(根據地)로한 문익공(文翼公)의 후손(後孫)들은 그 후 12명의 상신(相臣)을 배출하는
등 동래정씨(東萊鄭氏)의 화려한 명맥(明脈)을 이루었다.
이리하여 지금도 세상에서 이 일문(一門)을 가리켜 흔히 「서울 회동 정씨(會洞鄭氏)」라고 부르기도 한다.
林塘집안의 현신(顯臣)들
임당공(林塘公) 유길(惟吉:1515~1588)은 중종(中宗)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퇴계 이황(退溪李滉) 하서 김인후(河西金麟厚)등과 함께 호당(湖堂)을 거쳐 대사헌(大司憲)·대제학(大提學)·이조판서(吏曹判書)등을 역임하고 선조(宣祖) 중엽에 좌의정(左議政)까지 이르렀는데 한 때 명종조(明宗朝) 윤원형(尹元衡)과 가까이했던 사실로 사헌부(司憲府)의
규탄을 받은 일이 있긴 하지만 큰 정적(政敵)은 없었다. 문장(文章)과 시(詩)에 능(能)했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임당공(林塘公)의 자손(子孫)들이 빼어나게 번창했는데 그의 아랫대를 살펴보면 외아들 창연(昌衍)이 좌의정(左議政)을 지냈고 큰 손자 광성(廣成)이 형조판서(刑曹判書), 작은 손자 광경(廣敬)이 이조참판(吏曹叅判)을 지냈다. 증손대(曾孫代)에 가서 광성(廣成)의 아들 태화(太和:영의정(領議政)), 치화(致和:좌의정(左議政))와 광경(廣敬)의 아들 지화(知和:좌의정(左議政))등
3정승(政丞)이 났고 그 다음 대(代)에서 태화(太和)의 아들 재숭(載崇)이 우의정(右議政) 지화(知和)의 아들(系子) 재희(載禧)가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이어 임당(林塘)의 6대손인 석(錫)·형(亨)자 항렬에서 석오(錫五:좌의정(左議政)) 형익(亨益:예조판서(禮曹判書)), 7대손인 순(淳)·상(祥)자 항렬에서 홍순(弘淳:좌의정(左議政)) 상순(尙淳:이조판서(吏曹判書)) 경순(景淳:형조판서(刑曹判書)) 일상(一祥:호조판서(戶曹判書)), 8대손 존(存)자 항렬에서 존겸(存謙:영의정(領議政)) 존중(存中:공조판서(工曹判書))
9대손 용(容)자 항렬에서 원용(元容:영의정(領議政)) 시용(始容:영의정(領議政)) 헌용(憲容:공조판서(工曹判書)) 대용(大容:이조판서(吏曹判書)), 10대손 기(基)자 항렬에서 기회(基會:이조판서(吏曹判書)) 기세(基世:이조판서(吏曹判書)) 기선(基善:예조판서(禮曹判書)), 11대손 조(朝)자 항렬에서 범조(範朝:좌의정(左議政)) 건조(健朝:이조판서(吏曹判書))등 선조대(宣祖代:임당(林塘)의 조부(祖父) 광필(光弼)부터 따지면 중종조(中宗朝))에서 고종대(高宗代)에 이르는 전후 12대에 걸쳐 임당(林塘)의 집안은 정승(政丞)·판서(判書)의 성좌(星座)에
고루 오르내린 것이다.
특히 임당공(林塘公) 유길(惟吉)은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은인(恩人)이다. 조선사(朝鮮史)를 뒤져보면 인조(仁祖)~효종대(孝宗代)를 고비로 그때까지 세력(勢力)를 떨치던 구안동김씨(舊安東金氏)가 쇠퇴하는 대신 세칭 「장동김씨(壯洞金氏)」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가 새로이 일어났는데 그 계기를 만들어준 이가 곧 임당(林塘)이다.
정임당(鄭林塘)은 그때까지 별로 성세(盛勢)가 없던 신(新)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도정(都正) 김극효(金克孝)를 사위로 삼았는데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김극효(金克孝)의 관형을 보니 그의 몸에서 정승·판서가 나올 상(相)이어서 사위로 맞는다. 그 자신은 큰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정임당(鄭林塘)의 외손) 상용(尙容:우의정(右議政)),
상헌(尙憲:좌의정(左議政), 대제학(大提學)) 형제가 대작(大爵)에 올랐으며 그 중에서도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이야말로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서의 안동김씨(安東金氏)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장본인이라해도 좋을 것이다. 요즈음도 두 집안은 교목세가(喬木世家)로 가깝게 지낸다.
爲堂 鄭寅普
해방후(解放後) 동래정씨(東萊鄭氏)를 대표(代表)하는 가장 독보적 인물(人物)이 양파공(陽坡公)의 9대손 위당이다. 위당 정인보(爲堂鄭寅普)는 나라가 망(亡)한 난세에서 5천년간 이어온 조선(朝鮮)의 얼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고자한 지사였다. 1910년 중국에 유학하여 동양학(東洋學)을 전공하면서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 김규식(金奎植), 신채호(申采浩)등과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1918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延熙專門學校), 이화여자전문학교(梨花女子專門學校).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등에서 국학(國學)·동양학(東洋學)을 강의하는 한편, 시대일보(時代日報), 동아일보(東亞日報)등의 논설(論說) 위원으로 총독부의 침략정책(侵略政策)·을 비판, 민중(民衆)들에게 국혼(國魂)을 환기시켰다. 광복후 1948년 국학대학장에 취임. 1951년에는 초대감찰위원장을 지냈는데 6·25사변 때 납북되었다.
그는 “그러므로 학문이 얼이 아니면 헛것이 되고, 문학이 얼이 아니면 달(達)할 것이 없고, 역사(歷史)도 얼이 아니면 말할 데가 없다”며 조선의 얼을 강조했다.
국문학사, 한문학, 국사학 등 전반적인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시조(時調)·한시(漢詩)에도 능했다. 저서로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담원문존(薝園文存), 월남이상재선생전(月南李商在先生傳), 「조선문학원류고(朝鮮文學原流考), 담원시조집, 담원국학산고(薝園國學散稿)」등이 전(傳)한다.
3大相臣 家門
조선조(朝鮮朝)에서 17명의 상신(相臣)을 비롯한 수많은 명신(名臣) 현관(賢官)을 배출해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안동김씨(安東金氏)와 더불어 「3대상신가문(大相臣家門)」으로 유명을 떨쳤으며, 국난(國難)이 있을 때마다 충의열사(忠義烈士)가 배출되어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이 뛰어났던 석학(碩學)들과 함께 명문(名門) 동래정씨(東萊鄭氏)의
가통(家統)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부산시(釜山市) 양정동(楊亭洞) 화지산(華池山)에 있는 시조묘(始祖墓:시조(始祖)의 묘(墓)가 전(傳)하지 않아 2세인 정문도(鄭文道)의 묘(墓))에는 매년(每年) 음정(陰正), 한식(寒食), 단오(端午), 추석(秋夕), 동지일(冬至日)에 크게 제사(祭祀)를 드리고 있다.
번영의 理由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문익공파(文翼公派)가 주축(主軸)이 되어 찬연한 열력(閱歷)을 쌓았는데 동래정씨(東萊鄭氏)가 10여대(餘代) 400여년(餘年)이란 긴 세월에 걸쳐 번영을 누리게 된 이유는 몇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우선 문익공(文翼公)을 비롯하여 그의 많은 자손(子孫)들이 모두 당대(當代)에 이름을 떨친 재신(宰臣)들이었음에도 성품들이 온화하고 모가 나지 않았으며 또 큰 실책(失策)이나 정적(政敵)이 별로 없었다. 그것이 우리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선조조(宣祖朝) 이후 치열을 극했던 4색당쟁(色黨爭)에 동래정씨(東萊鄭氏)는 그 중 어느 파(派)에도 깊이 관여하지 않은 것도 하나의 예이다. 뒷날 세도(勢道)를 잡은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선대외가(先代外家)로서의 도움도 받았음직하다.
그러나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왕족이씨(王族李氏)와 세도정치의 안동김씨(安東金氏) 다음으로 많은 상신(相臣)을 배출하면서도 외척(外戚)으로 세력(勢力)을 얻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長壽집안
동래정씨(東萊鄭氏)에서 또 한가지 특기(特記)할 일은 「장수하는 집안」이라는 사실이다. 정승급(政丞級)만 따져봐도 정광필(鄭光弼)이 77세, 정유길(鄭惟吉)이 74세 정창연(鄭昌衍)이 85세, 정태화(鄭太和)가 72세, 정지화(鄭知和)가 76세, 정존겸(鄭存謙)이 73세 정원용(鄭元容)이 91세 등으로 장수(長壽)하여 모두들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은전(恩典)을 입었다.
|